[이슈분석]의료산업 불로초 '데이터', 병원 생존 좌우
2017-05-17 정용철 의료/SW 전문 기자
◇헬스케어 산업, '데이터'에서 답을 찾다
IBM에 따르면 개인이 일상생활에서 평생 동안 만들어 내는 의료 정보는 1100테라바이트(TB, TB=약 1조바이트)가 넘는다. 책으로 환산하면 3억권 이상이다. 각종 유전자 검사 등으로 발생한 유전체 데이터가 6TB, 병원을 방문해 만들어지는 의료정보 400기가바이트(GB, GB=약 10억바이트)까지 합치면 양은 엄청나다.
델EMC가 발표한 '디지털 유니버스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디지털 의료 정보 양은 2013년 153엑사바이트(EB, 1EB=10억 GB)에서 2020년 15배 가까이 늘어난 2314EB까지 늘 것으로 전망된다. 연평균 48% 커지는 등 산업군 가운데 가장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수집된 정보를 높게 쌓으면 2013년 기준으로 지구와 달 간 거리의 3%에 불과했지만 2020년에는 3분의 1 수준까지 높은 13만1966㎞가 된다.
헬스케어 데이터는 개인 건강뿐만 아니라 경제 수준, 사회·환경 요인을 모두 포함한다. 임상 연구를 포함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다. 현대의학으로 평가받는 정밀 의료가 확산되면서 헬스케어 데이터의 가치는 더 높아진다. 개인 건강 기록, 유전체 정보, 생활 습관(라이프로그) 정보 등 모든 데이터를 빅데이터화해 맞춤형 치료법을 제시하는 요소다.
병원 첨단화에도 헬스케어 데이터는 중요하다. 4차 산업혁명 바람이 불면서 병원도 대응에 나섰다. 인공지능(AI), 표적 신약, 개인 건강 관리 서비스 등 병원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수단도 모두 데이터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전 세계 병원뿐만 아니라 헬스케어 산업을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지목한 애플, 구글, IBM 등 글로벌 기업들도 자사 솔루션으로 헬스케어 데이터 확보에 열을 올리는 이유다.
◇국내 병원, 빅데이터 첫걸음 뗐다
우리나라 병원도 지난해를 기점으로 빅데이터 역량 확보를 시작했다. 그동안 병원은 의료 정보를 전산실 또는 의료정보실 등 부서에서 저장·관리하거나 제한된 분석을 담당했다. 데이터 수집·분석을 체계화하거나 품질 제고 노력은 부족했다.
병원 운영이 갈수록 어려워지지자 빅데이터에 눈을 돌렸다. 병원을 방문하는 환자 수나 시간, 연령, 진료 과목 분석부터 시작했다. 환자 유치가 과열되면서 병원 운영 효율화, 비용 절감, 마케팅 등 경영에 초점을 맞췄다.
외연 확대의 필요성도 커졌다. 대형병원은 환자 수가 꾸준히 증가하지만 낮은 수가 등으로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실제 국내 병원 90% 이상이 적자이거나 수익률이 한 자릿수에 불과하다. 환자 진료 외에 독자 치료법, 솔루션, 서비스가 필요하다. 연구개발(R&D) 역량이 부족한 병원은 데이터를 무기로 기업, 연구소, 학교와 함께 연구 환경을 공동 조성하기 시작했다. 엄격한 개인정보보호법, 의료법 등으로 기업이나 연구소가 환자 정보를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실제로 연세의료원은 지난해 11월 정밀의료데이터사이언스ICT센터를 개소했다. 서울아산병원은 올해 초에 기존 센터를 확대한 헬스이노베이션빅데이터센터를 오픈했다. 분당서울대병원, 가톨릭의료원, 고려대 안암병원 등 대형병원들도 잇달아 빅데이터센터를 열었다. 병원 내에 존재하던 데이터를 수집, 분석하는 시스템도 체계화했다. 인력도 5명에서 기업 수준으로 최대 20명까지 확대했다.
◇데이터는 공유하고, 아이디어는 모으고
병원 빅데이터센터는 단순 인프라가 아닌 '개방형 이노베이션' 창구 역할을 맡는다. 내부에서만 분석할 게 아니라 기업, 연구소, 대학과 공동으로 분석하거나 결과를 공유한다. 병원이 빅데이터센터를 개소한 목적도 외부와 공동 연구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함이다.
연세의료원은 빅데이터센터를 활용, 정밀의료데이터 플랫폼을 구축하고 있다. 600만명, 1300TB가 넘는 국내 최대 헬스케어 빅데이터를 보유한 만큼 내부 연구자는 물론 기업, 연구소가 공동으로 연구하는 환경을 만든다. 익명화, 비식별화한 샘플 데이터를 병원 내부 플랫폼에 올린다. 공개 수준, 대상 등을 정하는 위원회를 꾸리고 적정 수준을 만족한 기업에 제공한다. 최근 국내 10여개 기업과 4차 산업혁명 대응을 위한 공동 연구 업무 협약을 체결했다. AI, 디지털헬스케어, 신약 개발 등 다양한 연구 분야에 데이터를 제공한다.
김현창 연세대의료원 정밀의료데이터사이언스ICT센터 소장은 “정밀의료정보플랫폼은 개인 정보를 제외한 의료 정보를 기업에 제공하고, 적합한 절차를 거쳐 병원과 기업이 공동 연구하는 역할을 한다”면서 “실제 중환자실 입원 환자 가운데 패혈증 발병 여부를 미리 알려는 연구를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아산병원은 헬스이노베이션빅데이터센터를 데이터 분석뿐만 아니라 창업 등 사업화를 지원하는 시설로 키운다. 클라우드 플랫폼을 구축해 병원이 축적, 분석한 데이터를 공유한다. 한국마이크로소프트(MS)와 공동으로 의료 빅데이터 콘테스트를 개최, 사업화 아이디어를 모았다. 최근 의료 영상 정보와 혈압 데이터 등을 활용한 창업 사례까지 발굴했다.
김영학 서울아산병원 헬스이노베이션빅데이터센터 소장은 “단순히 데이터만 공유하는 게 아니라 분석법, 사업화 지원 등 창업을 위한 멘토링 서비스까지 제공한다”면서 “폐 컴퓨터단층촬영(CT)이나 뇌 자기공명영상(MRI) 정보, 혈압 데이터 등을 활용한 창업을 이끌었다. 고도화까지 지원, 병원과 기업이 손잡은 상생 모델을 만들 방침”이라고 말했다.
아주대병원은 국내 병원 최초로 10여년 동안 수집한 1.5테라바이트 분량의 환자 데이터를 공통데이터모델(CDM)로 변환, 외부에 공개했다. 환자 개인 정보를 삭제하고 내원 정보, 진단명, 처방 기록 등이 담긴 정보를 누구나 연구할 수 있도록 오픈했다. 다른 병원은 물론 기업, 연구소도 이 데이터를 활용한 다양한 연구가 가능하다.
분당서울대병원은 헬스케어혁신파크(HIP) 내 다수 기업과 빅데이터를 활용해 신약 개발, AI 기술 확보, 의료 정보 시스템 클라우드 전환 등을 위한 포괄 협력을 한다. 고려대 안암병원은 빅데이터를 활용한 AI 기술 확보에 총력을 기울인다. 뷰노와 치과용 AI 프로그램 개발을 포함해 국내 대기업, 외국계 기업과 협업해 의약품 복용과 관련한 AI 시스템 개발도 착수했다.
◇꽉 막힌 의료정보 규제·부족한 인력 양성, 경쟁력 확보 우려
정부도 헬스케어 빅데이터 인프라 확보에 나섰다. 보건복지부는 3월 보건의료빅데이터추진단을 꾸렸다. 산업통상자원부도 최근 '4차 산업혁명 바이오헬스산업 전략'을 발표하고 바이오헬스 빅데이터 구축 계획을 발표했다. 세부 전략에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헬스케어 빅데이터 인프라 구축 법 규제 개선 데이터 공유 등에 초점을 맞춘다.
전문가들은 정부도 헬스케어 빅데이터의 중요성을 인지, 투자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반겼다. 그러나 정부의 역할은 인프라보다 빅데이터에 투자하는 병원에 인센티브를 제공하거나 데이터 활용을 가로막는 규제 개선, 확보된 기술을 적용한 실증 사업 투자 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승은 가톨릭 스마트이미징바이오뱅크 은행장은 “지난해 정부가 의료 분야에 개인 정보 활용 가이드라인을 발표했지만 내용이 모호한 데다 부가 안정 장치 때문에 실효성이 떨어진다”면서 “다양한 데이터를 모으지만 기업과 공동으로 활용할 방법이 제한돼 있어서 큰 성과는 기대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김 소장은 “법 규제도 문제지만 병원이 환자 정보를 이용해 장사를 한다는 시민단체 등 사회 비판이 거세다”면서 “병원 영리화와 맞물리면서 데이터를 활용한 공동 연구 생태계 조성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를 해소할 정부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병원이 자체 구축하는 빅데이터센터 지원, 턱 없이 부족한 의료 데이터 전문가 양성, 병원 간 빅데이터 연계, 공유 방안도 해소해야 할 장애물이다. 적자에 허덕이는 병원은 빅데이터 투자 여력이 부족하다. 외국처럼 빅데이터를 활용해서 의료 서비스 수준을 혁신시키거나 기업과 연계해 성과를 거둘 경우 인센티브를 주는 것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 기업이 활용할 데이터 모수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제각각 운영되는 병원 데이터를 표준화하는 논의도 중요하다.
서정선 한국바이오협회 회장은 “병원 빅데이터센터 구축은 환영이지만 축적에만 집중, 호환과 접근성이 부족하다”면서 “예방의학은 다양한 정보와 호환으로 활용 가치를 높이는 게 중요하다. 미국 정부가 코호트 100만명을 구축해 정밀 의료를 구현하는 것처럼 우리도 전자의무기록(EMR) 데이터를 포함해 유전체 데이터, 라이프로그 데이터 등 다양한 데이터 활용을 모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영성 산업부 R&D전략기획단 박사는 “병원 산업화는 자생력을 기르고 우리나라 헬스케어 시장을 성장시키는 중요 요소”라면서 “올 하반기에 개인 건강 정보 활용을 원활히 하는 제도가 발의될 예정인 가운데 정부도 바이오 빅데이터 전문가 양성을 위해 전략을 수립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용철 의료/SW 전문기자 jungyc@etnews.com